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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壽衣)라는 용어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오는 때는 광해군 즉위년(1608)이며, 부의(賻儀)의 뜻의 사용된 수의(襚衣)가 순조대의 기록에는 염습의로서의 수의(壽衣)로 사용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수의는 출토복식을 통해 살펴보면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평상시 입던 의복이나 혹은 새로 장만한 의복을 사용하였고, 후기에 오면서 형태나 크기로 보아 염습의 용도로 수의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부터 문헌에 나타난 수의[염습의]를 살펴보면 조선 초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옷의 명칭을 바뀌었지만, 생시의 예복을 사용한다는 기본 원칙은 변함 없이 지켜지고 있다.

 

이 가운데 남자수의와 여자수의 중 주요한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남자수의

 ① 심의:심의는 유사(儒士)들의 예복으로서 수의의 제일 겉옷이다. 심의 대신 학창의나 도포를 입기도 한다. 심의는 의(衣)와 상(裳)이 허리선에서 연결되는 의상연의(衣裳連衣)로서 의신(衣身) 밑에 12폭의 상을 연결한다. 상의 폭은 앞이 6폭, 뒤가 6폭이다.


색은 백색으로 하며 공단·명주나 가는 모시로 한다. 깃·도련·부리에는 흑색 선(襈)을 두른다. 조선 중기에는 심의가 아닌 직령포(直領袍)를 입히기도 하였다. 경기도 과천에서 출토된 수의에 직령포가 있다.

 

R760x02.jpg② 중치막:소매가 넓은 두리소매에 양옆이 트이고 뒤 중심선이 허리까지 트인 네 자락으로 된 포로서 심의 속에 입힌다. 중치막 대신 창의(氅衣)를 입히기도 한다.

창의는 양옆이 트이고 뒤 중심선은 트이지 않은 세 자락으로 된 포이다. 창의는 소매가 넓은 두리소매로 된 것을 대창의(大氅衣)라고 하고 소매가 좁은 것을 소창의라 하며 ‘창옷’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에는 중치막이나 창의가 아닌 액주름포[腋注音袍:겨드랑이 주름포]를 입히기도 하였다.

③ 저고리:저고리는 생전에 입던 치수보다 품은 약 15㎝ 정도 넓게, 화장은 3∼10㎝ 정도 길게, 고대는 5㎝ 가량 넓게 하고, 기타 부위는 같은 비율로 넓게 한다.

④ 속적삼:겉저고리에 비하여 약간 작은 치수로 만든다. 안깃은 공그리고 겉깃은 안으로 혼다. 고름을 달지 않으며 입힐 때는 솔기가 살에 닿지 않게 뒤집는다.

⑤ 바지:바지는 생전에 입던 것보다 허리를 20㎝ 정도 넓게, 길이도 20㎝ 정도 길게 하며 바지통은 5∼10㎝ 넓게 만든다. 홑바지·겹바지로 만들거나 솜을 두기도 한다. 흰색 면이나 저포(紵布)로 만든다.

⑥ 고의:바지 속에 입는 속바지는 겉바지보다 약간 작은 치수로 만들며, 입힐 때는 솔기가 살에 닿지 않게 뒤집는다.

⑦ 행전:행전은 흰색 면포로 길이 약 30㎝, 너비 25㎝ 정도로 만들어 위에 끈을 꿰어 맬 수 있게 한다.

⑧ 버선:버선은 생전의 모양과 같게 하나 치수를 크게 하고 면이나 명주·모시[紵]로 한다.

⑨ 허리띠·대님:허리띠와 대님은 생전의 것과 같이 하며 남색 명주나 비단으로 한다.

⑩ 복건:검은색 갑사나 생고사로 만드는데 때로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기도 한다. 생전의 모양과 같게 만드는데 약간 크게 만든다. 

⑪ 명목:얼굴을 덮어 싸는 것으로서 가로와 세로 각각 30㎝ 정도의 정사각형에 겹으로 만드는데, 양쪽 귀나 네 귀에 끈을 단다. 겉과 안을 흰색으로 하거나 겉은 검은색, 안은 남색으로 하기도 한다.

⑫ 과두:명목과 꼭 같이 만드는데 명목보다 약 5㎝ 가량 더 크게 만들어 명목을 씌운 다음에 머리를 아래·위로 씌우는 보(褓)로서 겉과 안을 흰색으로 하거나 겉은 검은색으로 하고 안은 남색으로 하여 겹으로 만든다.

⑬ 복보(腹褓):배를 가리는 보로서 가로와 세로 각각 40㎝ 정도로 만들어 네 귀에 끈을 단다. 겉은 검은색, 안은 남색이다.

⑭ 악수:손을 싸는 것인데 가로·세로 25㎝ 정도로 만들어 양귀에 끈을 달거나 세로 25㎝, 가로 약 35㎝에 중간 부분을 들어가게 만들어 양귀에 끈을 단다. 겉과 안을 흰색으로 하거나, 겉은 남색, 안은 자주색으로 하기도 한다.

⑮ 오낭:머리카락을 넣는 주머니 1개, 좌우의 손톱을 넣는 주머니 2개, 좌우의 발톱을 넣는 주머니 2개로 모두 다섯 개의 주머니를 말한다. 다홍색 명주로 가로 약 20㎝, 세로 약 10㎝ 되는 천을 가로로 접고 세로로 접어 트인 쪽에 아귀를 내고 호아서 뒤집어 만든다.

⑯ 습신[襲履]:신발로서 갖신 비슷하게 만들며 남색 공단으로 만든다.

⑰ 조대:심의에 두르는 띠로 흰색에 검은 선(襈)을 둘러 10㎝ 정도의 폭으로 생전의 띠보다 약간 길게 만든다.

⑱ 베개:흰색이나 남색·자주색의 천으로 가로 30㎝, 세로 15㎝ 정도로 만들어 속에 솜을 얇게 둔다.

⑲ 지요:입관할 때 시신 밑에 펴는 요로서 흰색이 보통이나 남색·자주색의 겹으로도 만들며 길이 170㎝, 너비 40㎝ 정도로 한다.

⑳ 대렴금:대렴을 할 때 시신을 싸는 이불이다. 220㎝ 정도의 길이로 너비는 5폭으로 하는데, 남색 바탕에 자주색 깃을 달거나 자주색 바탕에 남색 깃을 달기도 하고 흰색 동정을 약 17㎝ 정도로 두른다.

㉑ 소렴금:소렴을 할 때 시신을 싸는 이불로서 대렴금과 같으나 세 폭으로 한다.

㉒ 천금:입관 후에 시신 위에 덮는 이불인데 길이 170㎝, 너비 40㎝ 정도로 하고 흰색이나 남색으로 하며 겹으로 만든다. 공단이나 명주로도 만든다.

 

(2) 여자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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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원삼:원삼은 내외명부(內外命婦)들의 예복 및 혼례복인데 민가에서는 혼례복으로 입었다. 수의로 쓰는 원삼은 생전의 것보다 크고 풍성하게 만든다. 흰색으로 하기도 하고 연두색 길에 다홍색 안을 대고, 소매에는 홍·황·청의 색동을 대고 흰색 한삼을 댄다. 깃과 고름은 자주색으로 댄다. 공단·나단이나 가는 베로 하며, 혼례 때에 사용하였던 것을 써도 무방하다.

정경부인이나 정부인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원삼 밑에 당의를 더 입힌다. 옛날에는 격식이 엄격하여 가풍과 지위에 따라서 한 가지라도 더 하거나 덜 하지를 못하였다.

② 당의:내외명부들의 예복으로 정3품 이상에서만 수의로 썼다. 흰색으로 만들기도 하고 연두색 길에 자주색의 깃과 고름을 단다.

③ 치마:홍상(紅裳)을 겉에 입히고 청상(靑裳)은 속에 입히는데 모두 흰색으로 안을 댄다.

④ 저고리:겉에는 연두색 길에 자주회장저고리를 입히고, 속에는 노란색 길에 자주회장을 입히고 그 속에 분홍 겹저고리를 입혀 저고리 삼작을 갖추어 입히고, 속에는 속적삼을 입힌다.

⑤ 여모:겉은 검은색, 안은 다홍색으로 길이 30㎝, 가로 50㎝ 정도로 양쪽을 좁히면서 둥글려 머리를 쌀 수 있게 만든다. 그 밖의 것은 남자수의와 비슷하며 치수만 약간 작다.

 

염습할 때 입는 옷

수의는 시신을 염습할 때 입히는 옷이므로 염습절차에 따라 입히게 된다. 염습은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습(襲)·소렴·대렴의 순서로 엄격하게 지켜졌지만 오늘날에는 간략하게 염습을 같은 날에 함께 행하기도 하며 이를 통틀어 염을 한다고 한다.

 

① 습 : 습은 사자의 몸을 씻긴 후 수의로 갈아 입히는 것으로 사망한 당일에 행하는 절차이다. 조선시대 예서에 따르면 제일 겉옷인 심의와 같은 상복(上服)을 펴놓고 겉옷에서 속옷 순서로 옷을 끼운 후 시신에게 입힌다.

② 소렴 : 습을 한 시체를 옷과 이불로 싸는 절차로 습을 한 다음날 한다. 횡교포(橫絞布)를 가로로 놓고 그 위에 종교포(縱絞布)를 길이로 놓은 다음 소렴금을 펴놓는다. 그 위에 상의를 놓고 시신을 놓은 다음 보공(補空)을 한다. 금(衾)으로 싼 다음 교포로 묶는다.

③ 대렴 : 소렴을 한 시신을 이불과 옷으로 다시 싸서 입관을 하는 절차로 죽은 지 3일 되는 날 행한다. 관의 밑바닥에 회(灰)를 깔고 칠성판(七星板)을 놓고 그 위에 지요를 깔고 다시 그 위에 대렴한 시신을 놓는다. 오낭을 좌우에 넣고 평상시에 입던 옷으로 관을 채워 보공한 뒤에 천금을 덮고 다시 천판(天板)을 덮은 뒤 못을 박고 관 위에 구의를 덮어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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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상례의 방법은 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수의와 염습법은 유교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시대 후기 방법을 따르고 있다. 현재도 가풍이 엄격한 집안의 수의는 조선시대 예서의 기본이 되었던 ≪주자가례≫의 격식을 지키고 있어 조선시대 중후기의 예복인 심의·도포 등을 사용하고 있다.

 

수의는 부모의 환갑·진갑이 가까워지면 가정형편에 따라 수의를 지어두기도 하며, 형편이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상을 당한 후 기성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3년마다 돌아오는 윤달에 수의를 짓는 관습이 있는데, 윤달은 공달이라 하여 죽는 사람의 평안을 축복하는 뜻에서 지어지며 그 풍습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부모의 수의를 만들 때는 효를 다하기 위하여 윤달 가운데 길일을 택할 뿐만 아니라 팔자 좋고 장수한 노인들을 모셔다가 바느질을 하였는데, 솔기 중간에 실매듭을 짓지 않게 하여 저승길을 갈 때 걸리지 않고 편안하게 가기를 염원하였다.

 

또한 치수나 폭 수에 있어서도 짝수로 하지 않고 홀수로 하였다. 수의의 형태는 생전 예복과 같은 길복(吉服)으로 하며 치수는 생전의 옷보다 크고 넉넉하게 만든다. 옷감은 공단(貢緞)이나 명주(明紬) 같은 견직물과 모시·삼베[麻]등을 사용하는데, 빨리 썩는 것이 좋다고 하여 모시나 삼베[麻布]를 많이 사용한다.

 

수의의 색상은 보통 염색하지 않은 소색을 많이 사용하지만, 옅은 색을 사용하거나 평상시 예복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가문에 따라 수의는 옷깃과 섶 그리고 시접 방향을 생시의 옷과 반대로 하기도 한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수의는 옷의 품목에 따라 갖춘 수의 , 보통 수의로 나뉜다.

 

남자 수의에는 속바지·속저고리·겹바지·겹저고리·두루마기·도포·겹요·겹이불·면모·악수·주머니(오낭)·버선·허리끈·대님·도포 띠·턱받침·베개·손수건이 갖춘 수의이며, 보통 수의는 갖춘 수의에서 도포·악수·도포 띠·턱받침이 없다.

 

여자의 갖춘 수의에는 속바지·속저고리·겹바지·겹치마·겹저고리·두루마기·원삼·겹요·겹이불·면모·악수·주머니·버선·원삼띠·턱받침·베개·손수건이 있다.

 

여자의 보통 수의는 속바지·속저고리·겹바지·속치마·겹저고리·겹요·겹이불·면모·악수·주머니·버선·베개·손수건·머리싸개가 있다. 한편 지방에 따라 혼례 때 입었던 예복을 수의로 사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수의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수의를 비교하여 보면 신분에 따라 달랐던 수의가 현재에는 경제 형편에 따라 사용되고 있으며, 기본 복식의 형태는 조선시대 후기의 복식과 같지만 염습에 사용되는 도구와 장례절차에 사용되는 치관제구가 간략해 짐을 알 수 있다. 또한 장례법이 점차 화장과 납골당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에 따라 수의도 달라질 것 같다.

 

장례문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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